※ 외유내강 20주년 기획전에 대한 글은, 아래 <부당거래>에 대한 두 번째 글에서 이어집니다.
<모가디슈>와 <베테랑> 시리즈로 이어지는
워커홀릭의 세계 <베를린>

<베를린>에서 하정우는 세 편의 영화를 찍는다. 한석규와는 <첩혈쌍웅>을 찍고, 류승범과는 <무간도>를 찍고, 전지현과는 <타인의 삶>을 찍는다. 하정우가 연기하는 북한 최고 실력파 요원 표종성은 북한쪽 비밀계좌를 추적하던 남한 국정원 요원 정진수(한석규)로부터 쫓긴다. 또한 북한은 표종성을 감시하기 위해 냉혹한 또 다른 요원 동명수(류승범)를 파견한다. 설상가상 그 사이에서 아내(련정희)를 의심해야 하는 순간과도 맞닥뜨린다. 이후 국정원 베를린 조직 내에서 점차 밀려나는 위치에 놓인 정진수는 마찬가지로 버림받은 표종성의 처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고, 누군가의 비호를 받는 듯 제멋대로인 동명수는 이미 오래전부터 표종성과 그의 아내를 알고 있던 사람으로 등장하며, 표종성은 아내가 자기 몰래 뭔가 비밀스러운 일을 진행하는 것 같다고 느껴 하나뿐인 아내를 미행하기에 이른다. 오우삼의 <첩혈쌍웅>의 주윤발과 이수현처럼 점점 동화돼 가는 적, 유위강과 맥조휘의 <무간도>처럼 잘못된 뿌리로부터 뻗어나가게 된 두 사람, 그리고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의 <타인의 삶>처럼 불신의 유혹에 휩싸인 부부라는 설정이 한데 녹아있는 것.

류승완의 영화는 기본적으로 워커홀릭 남자들의 세계다. 그건 감독이 워커홀릭이라서 그렇다. 그의 이전작 <부당거래>의 세 남자 최철기(황정민), 주양(류승범), 장석구(유해진)는 누가 더 일을 많이 하는지, 누가 더 악당인지 경쟁하는 영화였다.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자료와 증거를 준비하고 또한 그것을 예상한 당사자는 그 이상의 증거를 제시하려 동분서주했다. ‘배우’가 등장한다는 점도 똑같다. <부당거래>에서 부정한 검사와 경찰은 연쇄살인사건이 오리무중에 빠지자 ‘가짜 범죄자’를 지칭하는 ‘배우’를 내세우며 결탁했다. <베를린>의 표종성도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권력관계가 이동하는 묘한 시기에 바로 그 배우가 될 위기에 처한다. 상관 리학수(이경영)와 아내 또한 배우로 낙점된다. 그래서 더 복잡하다. <베를린>의 첫 번째 재미는 바로 그 배우가 배우를 의심한다는 데서 발생한다. 말하자면 <베를린>은 ‘북한판 <부당거래>’다.

<부당거래>에서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하게 지워져 있었다면, 그리하여 더 큰 현실의 무게로 수렴하는 라스트를 보여줬다면 <베를린>은 끝까지 힘 대 힘으로 충돌하는, 선과 악의 경계가 명쾌한 첩보액션영화다. 정진수가 몰래 CIA 요원을 만나 존 르 카레의 소설책에 자료를 끼워 건넬 때 본격적인 스파이 장르로 탈바꿈한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의 원작자이기도 한 존 르 카레는 실제 베를린에 파견되어 영국의 스파이로 활동했었으며 당시의 경험은 작품에 생생하게 반영됐다. 특히 그는 이전의 용감무쌍한 행동파 스파이가 아닌,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보다 음울한 안티히어로로서의 스파이를 그려내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특히 마틴 리트에 의해 영화화된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1965)처럼 정부와 개인이라는 경계에서 갈등하는 요원 알렉 리머스가 떠오른다. <베를린>은 거기에 하나의 경계를 더한다. 바로 아내의 존재다.

류승완 감독을 이야기할 때, <짝패>에서 짝패로 출연한 정두홍 무술감독과 서울액션스쿨의 존재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그 파트너십은 역시 정두홍이 악역으로 출연한 <아라한 장풍대작전> 이후 <모가디슈>(2021)까지 이어지고 있다. <베를린>의 경우 2000년대 들어 스파이 액션영화의 새로운 전형을 만들어낸 <본 아이덴티티> 스타일의 간결하고 스피디한 액션 설계를 주조로 하고 있다. 물론 액션 그 자체만으로 스토리와 캐릭터의 상승효과를 빚어내는 류승완의 솜씨는 그 이상이다. <부당거래>에서 최철기가 장석구를 유도하듯 넘어트리며 공격하는 장면과 골프장에서의 살해신 정도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액션연출이 없었기에, 그 갈증을 한방에 해소하려 한 것일까. <베를린>의 액션신은 그 파괴력이 남다르다. 북한식 격술에 바탕을 둔 간결하고 절제된 동작은 이른바 ‘본 스타일’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또한 다르다.

표종성의 집으로 킬러(서지오)가 찾아오고 두 사람은 방안의 이곳저곳, 그리고 창문을 뚫고 밖으로 떨어지면서까지 입에 거품 날 정도로 싸운다. <본 얼티메이텀>(2007)에서 제이슨 본(맷 데이먼)이 책꽂이의 양장본 책을 꺼내 상대의 머리를 찍던 것처럼 표종성은 냉장고의 큰 통조림캔을 꺼내 공격한다. 그렇게 손에 잡히는 대로 싸우며 찬장과 옷장 하나둘 박살 내며 찍고 찍히고 박고 찢기고 급기야 날아오른다. 지붕 끝을 잡고 자리를 피하던 련정희도 총을 쏜다. 대결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 때쯤 굵은 전선이 표종성을 휘감으며, 그의 몸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계추처럼 진자운동을 하며 이리저리 처박는다. <본>이나 <007> 시리즈였다면 대결이 끝날 즈음 기계식 주차장의 차들이 쏟아져 내리거나 빌딩의 벽이 무너졌을 것이다. 그런데 <베를린>은 끝까지 ‘사람’을 물고 늘어진다. 표종성의 고통이 온몸으로 전해지는 듯하다. 그를 연기한 하정우는 ‘배우가 훈련만으로 어느 정도의 액션 수준까지 가닿을 수 있는지’ 온몸으로 보여준다.

<베를린>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류승완 감독이 마흔 살에 만든 영화다. 마지막 30대를 보내며 만든 <부당거래>에 가장의 고단함이 묻어났다면, <베를린>에는 이전 영화들과의 자연스러운 결별 혹은 참회의 시선이 엿보인다. 첩보액션이라는 장르의 길을 따라 다다르게 되는 지점은 바로 표종성과 련정희의 멜로드라마다. 그것은 <베를린>이 그의 이전 영화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핵심이다. 그는 지금껏 이른바 ‘남녀 관계’ 혹은 ‘멜로 감성’을 영화의 본질적인 테마로 내세운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건 죽는 남자와 나쁜 남자들만 나온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에서 이미 정해진 미래였다. <피도 눈물도 없이>(2002)에서 전직 라운드걸 수진(전도연)과 전직 복서 독불(정재영)의 관계는 일찌감치 파탄 난 거나 마찬가지였고, <아라한 장풍대작전>(2004)에서 상환(류승범)과 의진(윤소이)의 관계는 풋풋한 ‘썸’ 이상의 진전이 없었으며, <짝패>(2006)에서 미란(김서형)을 오랜만에 만난 태수(정두홍)는 그저 머뭇거리기만 한다. 그는 언제나 의도적으로 그런 감정과 관계를 배제하면서 이야기를 끌어갔다.

<베를린>의 표종성이 그러하듯 그의 영화에서 남자들은 언제나 일밖에 몰랐다. 결국 류승완이 <베를린>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이념의 대립이 낳은 스릴러의 구조, 첩보 액션의 묘미라기보다 국가를 향한 맹목적 충성이라는 허상, 혹은 워커홀릭의 삶을 살아오던 남성 주인공들이 불현듯 깨닫게 되는 내밀한 감정이 아닐까. <부당거래>에 이어 <베를린>을 통해 류승완 감독의 ‘성숙’을 말할 수 있다면, 아마도 그가 처음으로 만든 진심의 멜로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이전의 그가 다루길 주저하던 그 ‘감정’을 읽을 수 있는 영화였다. 그것은 이후 <군함도>(2017)에서 칠성(소지섭)과 말년(이정현)의 모습으로도 이어졌지만 멀티캐스팅인 영화에서 전면에 나서지 못하는 서브플롯 정도였다.

그러다 <모가디슈>(2021)에 이르러 한신성(김윤석)과 림용수(허준호)의 우정, 혹은 평자에 따라 이루지 못한 퀴어 멜로라고도 부를 수 있는 감정으로도 나아갔다. <밀수>(2023)에서도 서브플롯 수준이지만, 춘자(김혜수)와 전국구 밀수왕 권 상사(조인성)의 관계도 그렇다. 과거 <피도 눈물도 없이>(2002)의 수진(전도연)과 독불(정재영)의 어색했던(?) 관계를 떠올려보면, 거의 20년의 세월이 흘러서일까, 아니면 조인성이라는 배우가 가진 아우라 때문일까, 멜로적 상황에 은근한 유머까지 자연스레 더해진다. 최신작 <베테랑2>(2024)에 이르기까지, 류승완 유니버스의 가장 달라진 점이라면 캐릭터들 사이 감정의 진폭을 보다 자유로이 그려낸다는 점이다. 그것이 최초로 발화한 작품이 바로 <베를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