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빨간 추리닝 차림의 한 여자가 공터에서 바람이 빠진 채로 버려진 축구공을 벽으로 차며 말한다. “얘는 바람이 빠져서 버려진 걸까. 버려져서 바람이 빠진 걸까? 난 이 모양이라 이렇게 사는 걸까. 이렇게 살아서 이 모양인 걸까”. 그녀는 자신의 이름인 ‘미지’처럼 ‘아직 모른다’. 아직 알 수 없기에 반복하는 미지(박보영)의 실존적 방황은 끝내 비교와 자책으로 이어진다. 자신과 달리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을 부지런히 쌓은 쌍둥이 자매 미래(박보영)를 떠올리며, “그래 내 탓이지… 바람 빠진 내 탓이지”하며 잘근잘근 스스로 채근한다. 언뜻 보면 한낱 푸념으로 보이는 미지의 독백은 근원적인 물음을 담고 있다. 개인의 삶은 태어나면서 정해진 구조와 환경의 문제일까. 개인의 주체성과 능력의 문제일까. 드라마 <미지의 서울>은 신자유주의의 무한 경쟁 시대에서 되뇌게 되는 이 질문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이강 작가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경험하는 실존적 고통과 지금의 시대정신을 이번 드라마에서 처절하게 반영한다. 하나의 유령이 대한민국을 배회하고 있다. ‘생존주의’라는 유령이.
“지금 네 나이가 마지막 파종 시기야”

무한 경쟁 사회에서 사람들은 생존하기 위해 쫓기듯이 자기관리와 자기계발을 지속한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대두된 생존주의는 단순히 생물학적 생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적 생존은 하나의 ‘메타포’다. 그것과 의미론적으로 대립하는 것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경쟁 상황에서의 ‘도태’다. 신자유주의적 생존은 목숨을 부지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러 형태의 경쟁에서 밀려나지 않고 소수의 선택된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서바이벌리스트 모더니티」, 김홍중, 이음, 2024, 208쪽).


미지가 겪는 실존적 방황도 심리적 죽음에 맞먹는 도태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서른’이라는 딱지를 붙인 미지는 가족과 두손리 마을 사람들의 근심거리다. 학교 청소, 마트 일, 농사일 등을 도우며 ‘프로 단기계약직’의 삶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살이에 급급한 미지에게 사람들은 너도나도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오늘은 미지의 이웃이기도 한 염분홍(김선영) 교감 선생님의 훈화 말씀을 들을 차례다. “아줌마가 우리 미지 진~짜 딸 같아서 하는 말이니까 고깝게 듣지 마. 서른은 결코 늦은 나이가 아니지만, 그렇게 이른 나이도 아니야. … 딱 지금 네 나이가 마지막 파종 시기야. 너 지금 이렇게 아무것도 안 뿌려 놓으면 나중에 농번기 때 뭘 수확하려고?”. 분홍은 인생을 농사에 비유한 자신의 심오한 말뜻을 미지가 이해하지 못하는 듯해 보이자 콕 집어 다시 말하며 잔소리를 이어간다. “진로 탐색보단 결정을 할 나이라는 거야, 서른은”. 분홍의 잔소리는 생존주의의 문화가 개인에게 가하는 압박을 여실히 보여준다. 바쁘게 돌아가는 사회는 자신을 진정으로 알아가거나 혹은 되찾을 시간을 내어주지 않는다. 유명 로펌에서 일한 변호사 호수(박진영)는 집단의 이익을 위한 규율에 맞춰 살아가다 자신을 잊기도 했다. “원래 마음에 뭐가 걸리면 신발에 돌 들어간 애처럼” 굴었던 호수는 회사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신념을 조금씩 접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호수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내가 나를 모르고 잊어버리는 게 말이 되니? 근데 그랬더라고, 그동안”.
서로가 되어 살아보기

어린 시절부터 엘리트의 길을 걸어온 미래의 삶도 고단하기는 마찬가지다. 서울의 금융 공사에 다니는 미래의 정당한 내부 고발은 부당한 집단 따돌림이 되어 그녀 자신에게 돌아왔다. 미래는 직장 내 괴롭힘에 맞서는 대신 묵묵히 참는다. 가족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할머니의 간병비를 내기 위해, 미래는 자신이 제일 잘하는 ‘참는’ 일을 한다. 서울에서 홀로 힘겹게 버티는 미래의 사정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미지는 미래의 삶을 대신 살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그들의 ‘인생 바꿔서 살아보기’가 시작된다.


그들의 바꿔 살아보기는 도시와 농촌, 서울과 지방,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 사회적으로 구획된 경계를 넘나든다. 미지와 미래는 각자의 자리에서 겪는 불안과 상처, 사회적 시선과 차별을 상대가 되어서 몸소 경험하고, 그제야 비로소 서로의 삶을 깊이 이해한다. 나아가 타인의 삶을 경험함으로써 자신을 객관화하고 자책과 자기 비난의 악순환에서 빠져나온다. 할머니가 뇌경색으로 쓰러진 이후 오랜 시간 자신을 탓해 온 미지는 미래가 되어서야 깨닫는다. “남이 되어서야 알았다. 나의 가장 큰 천적은 나라는 걸”. 그렇게 미지와 미래는 나라는 이유로 누구보다 자신을 가혹하게 대했던 숱한 나날들을 놓아준다. 미지와 미래의 서사는 생존주의 문화 속에서 자기 자신이 가장 큰 적이 되어버린 현대인에게, 타인의 삶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고 치유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생존에서 공존으로

<미지의 서울>은 ‘누칼협’(“누가 칼 들고 협박했냐”는 의미의 신조어) 시대의 생존주의를 고스란히 반영하기도 한다. 누칼협은 즉 “누가 너한테 그걸 하라고 강요했냐” 혹은 “누가 시켰냐, 네가 알아서 한 거 아니냐”는 식의 자기 책임론으로 각자도생의 시대와 자기 책임의 논리가 극단화된 현실을 풍자적으로 드러낸다. 이 말은 <미지의 서울>에서도 짧게나마 등장한다. 도시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할아버지가 남긴 딸기밭을 이어받은 초짜 농장주 세진(류경수)은 농촌의 텃세를 한몸에 받는다. 미지가 뜻밖의 일로 서울살이를 하게 되면서 도시 생활의 고단함을 보여준다면, 세진은 귀농 또한 여의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마을 주민의 추천으로 유기농 농사를 지은 세진의 지난 한 해 딸기 수확량은 세 박스에도 못 미친다. 정작 유기농법을 추천한 마을 주민은 세진에게 되려 “야 내가 너보고 뭐 칼 들고 유기농 하라고 협박했어?”라며 으름장을 놓는다.

<미지의 서울>은 한국 사회의 시대정신과 일상 깊숙이 침투한 생존주의를 진단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의 실존적 고통을 포착한다. 하지만 드라마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그 너머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서울살이도 처음, 직장 생활도 처음인 ‘미지의 서울’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기에 불안이 점철된 공간이지만, 다가오지 않는 미래는 아직 모르기에 가능성과 희망의 공간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 방문을 넘어서지 못했던 미지는 오늘도 마법의 주문 같은 말을 되새기며 불안을 넘어선다.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아직 멀었고 오늘은 아직 모른다”. <미지의 서울>은 생존이 목적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되찾기 위한 미지의 여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