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5일 재개봉한 <그을린 사랑>. 현재 <듄> 시리즈, <컨택트>,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등을 만들어 한국관객들에게도 사랑받는 드니 빌뇌브의 출세작으로 특히 파격적인 전개와 탄탄한 구성으로 호평받았다. 중동 지역의 종교 갈등을 관통하는 이야기라서 세계 정세를 녹인 오리지널 스토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희곡을 원작으로 둔 작품이다. 영화계가 희곡을 각색해 영화로 내놓는 일은 영화사 전체로 보면 자주 있는 일이지만, 각색할 작품이 대폭 늘어난 2000년대 들어와서는 상당히 많이 줄어든 편이다. <그을린 사랑>을 비롯해 원작을 각색한 2000년대 이후 영화들을 몇 편 소개한다.
<그을린 사랑>

앞서 말한 <그을린 사랑>이 희곡 원작임을 알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보다 제목 때문이다. 국내에서 <그을린 사랑>으로 개봉한 이 영화의 원제는 ‘Incendies’이다. 프랑스어로 화재를 뜻한다(드니 빌뇌브는 프랑스어를 쓰는 캐나다 퀘백주 출신이다). 그리고 원작 희곡의 제목은 「화염」. 원어로는 ‘Incendies’로 똑같은 제목이지만 국내에 넘어오며 영화와 희곡 간의 제목 차이가 커서 영화나 원작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놓치기 쉽다. 「화염」을 집필한 와즈디 무아와드는 레바논에서 태어났지만 레바논 내전으로 파리로 망명한, 그리고 파리에서 영주권 문제로 퀘벡에 건너왔다.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인생을 뒤바꾼 레바논 내전에 관심을 가졌고 전쟁을 배경으로 한 여러 비극적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화염」은 그중 레바논 내전 당시 레지스탕스로 활동한 소하 베차라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집필한 작품이다. 출판사 지만지드라마가 와즈디 우마와드의 ‘비극 4부작’이라 불리는 작품 중 「화염」, 「숲」, 「연안 지대」를 발간했다.

<더 파더>

2021년 영화 <더 파더>는 안 그래도 드문 ‘희곡 원작 영화’ 중에서도 희귀한 케이스다. 원작자가 직접 영화를 연출했기 때문이다. <더 파더>를 연출하고 각본을 쓴 플로리안 젤러(출판물은 플로리앙 젤레르로 표기)는 작가다. 2000년대 초반부터 희곡과 소설을 쓰던 그는 2020년 자신의 희곡 「아버지」를 영화로 옮긴 <더 파더>로 영화감독에 도전했다. 그 이전 그가 연출한 영상물은 TV 다큐멘터리 1편이 전부였지만, 자신의 작품을 완벽하게 프레임 안에 옮겨놓으며 호평받았다. 원작이 프랑스에서 초연 당시 프랑스 연극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몰리에르상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던 것에 이어 영화도 미국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각색상을 수상했다. 그는 곧바로 자신의 또 다른 희곡 「아들」을 영화 <더 썬>으로 옮겼다. 아쉽게도 두 작품과 함께 ‘가족 삼부작’으로 일컫는 「어머니」는 아직 영화화하지 못했다. 대신 오리지널 각본으로 <더 벙커>라는 신작을 작업 중이다. 영화가 개봉한 후 「더 파더」는 국내에서도 공연됐는데, 전무송 배우가 앙드레 역을 맡아 강렬한 연기를 선보였다. 출판사 지만지드라마가 젤레르의 희곡 「아들」, 「아버지」, 「어머니」, 「타인」 네 작품을 출간했다.

<문라이트>

<문라이트> 원작이 희곡이라고? 놀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문라이트>의 원작은 세상에 공개된 적이 없으니까. 베리 젠킨스가 연출한 <문라이트>는 터렐 앨빈 맥크레니가 쓴 미공개 희곡을 바탕으로 각색했다. 미공개 희곡이 어떻게 원작이 될 수 있나 싶지만, 원작의 제목 「달빛 아래 흑인 소년들은 파랗게 보인다」(In Moonlight Black Boys Look Blue)가 영화에 가장 중요한 모티브이며 맥크레니의 인생이 반영된 작품이므로 희곡이 없었다면 영화 <문라이트>도 분명 탄생할 수 없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이 베리 젠킨스에게 닿은 경위도 참 드라마틱한데, 맥크레니가 원작을 공연하는 걸 포기한 것이 단초였기 때문. 맥크레니는 완성한 희곡이 막상 연극 무대에 적합하지 않다는 걸 깨닫고 연극화를 포기했는데, 그 미공개 희곡을 한 영화제에서 베리 젠킨스에게 전달하면서 영화화까지 이르렀다. 놀랍게도 젠킨스와 맥크레니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지만 어린 시절 같은 동네에서 자랐고, 그래서 맥크레니의 경험이 반영된 희곡이 베리 젠킨스의 마음을 흔들었던 듯하다. 원작자가 연극화를 포기했으니 앞으로도 원작을 만날 기회는 없겠지만, 맥크리니는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각색상을 수상하는 데 성공했다.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2017년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도 희곡을 원작으로 한다. 이 영화도 원작 희곡을 찾기가 쉽지 않은데, 먼저 한국에서 정식 출간되지 않은 데다 (<그을린 사랑>처럼) 원작과 제목이 판이하기 때문이다. 조던 해리슨이 쓴 원작의 제목은 「마조리 프라임」(Marjorie Prime). 주인공이자 80세 치매 노인 마조리와 죽은 이의 정체성을 재현하는 A.I. 프라임을 합친 제목이다. 작품을 보면 그 제목이 곧바로 이해가 되는데, 안본 사람들에겐 어리둥절한 제목이긴 하다. 마조리가 남편 월터의 젊은 시절을 빼닮은 프라임과, 그리고 마조리의 주변 인물들이 프라임으로 상대를 기억하는 모습이 켜켜이 쌓이며 기억이 무엇이고 우리가 마주하는 존재는 얼마나 확장될 수 있는가 작품은 묻는다. A.I.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하기 전, A.I.를 향한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상상력은 퓰리처상 희곡 부문 후보로 지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