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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 자크 오디아르가 선보인 문제적 걸작 〈에밀리아 페레즈〉, 김나희 평론가의 시선

씨네플레이
〈에밀리아 페레즈〉
〈에밀리아 페레즈〉


우리는 극장에서 다양한 층위의 영화와 만난다. 어떤 영화는 놀라운 수준의 화면과 미적 완성도를 갖추고도 서사가 미진해 아쉬움을 남기고, 어떤 영화는 미학적 부족함이 있으나 충실한 힘으로 이야기를 전하기도 한다. 보통 ‘걸작’은 종합예술로서 영화의 완성도를 다 갖춘 작품이다. 아득해질 만큼 미적 완성도가 있고, 인물의 감정에 이입되어 마음이 흔들리고 오랜 여운이 남으며, 영화가 쌓아 올린 서사에 압도되어 육체적인 충격이 느껴지는 그런 작품들이다. 거장 감독들은 단순히 서사를 전달하는 이야기꾼에 그치지 않고, 끌과 정을 손에 쥔 조각가처럼 관객의 감정에 구체적 형상이 깃들게 해준다. 이런 걸작 덕에 영화는 그저 엔터테인먼트에 그치지 않고 매번 그 경계를 확장시키며 ‘제7의 예술’임을 인정받는다. 전작들을 통해 이미 영화의 밀도 높은 서사를 선보여온 자크 오디아르 감독은 이번 <에밀리아 페레즈> 에서 이미지와 음악, 내러티브를 융합하여 깊은 울림을 준다.

 

<에밀리아 페레즈>는 현실과 환상을 구별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연출된 오프닝부터 대담한 파격을 선보인다. 영화 초반부터 노래와 춤으로, 리타(조 샐다나)의 상황을 단숨에 이해하게 된다. 조 샐다나가 열연한 리타는 삼십 대 중반의 유능한 변호사로 누구보다 성실히 일하지만, 막상 법정에서 변론을 펼치는 것은 리타가 다 써준 원고조차 외우지 못하고 헤매는 백인에 가까운 외모를 지닌 남자 상사다. 리타는 돈 많은 부자가 아내 살인 사건의 혐의를 벗고 자살로 마무리하게 돕는다.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지만 박봉이라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할 수도 없고 연애를 꿈꿀 수도 없다. 최후 변론을 준비하느라 미처 탐폰을 챙기지 못할 정도로 자신을 쏟아 붓는다. 벽에 학위와 변호사 자격증을 걸어 둔 리타는 단정한 수트를 입고 있으나, 함께 춤추는 주변 앙상블은 청소 일용직 여성들이다. 

 

〈에밀리아 페레즈〉
〈에밀리아 페레즈〉


자크 오디아르가 원래 오페라로 구상했던 이 영화는 웅장하고 대담한 오케스트라 반주에 곳곳에서 서정적인 아리아를 곁들인 오페라가 그러하듯 , 무대 공연 예술의 덕목을 유지하면서 단숨에 인물이 처한 상황을 풀어가며 서사를 이끌어 나간다. 멕시코 카르텔의 리더 마니타스 델 몬테(카를로 소피아 가스콘)는 과거를 버리고 에밀리아 페레즈로 다시 태어난다. 자칫 감정적으로 과잉이 될 수 있는 이 변신 -성 전환-의 순간을, 오디아르는 탁월한 절제와 우아한 접근으로 풀어냈다. 에밀리아 페레즈 역을 맡아 성전환 전 남성의 모습까지 1인 2역을 소화해 낸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은 캐릭터의 혼란과 갈망, 궁극적인 해방과 치밀어 오르는 질투의 순간을 담아내는 연기를 선보이며 이쪽에 있으면서도 저쪽을 넘보는 인물을 그려냈다. 

 

〈에밀리아 페레즈〉
〈에밀리아 페레즈〉


<에밀리아 페레즈>가 진정으로 특별한 이유는, 오페라에 가까운 몰입감 넘치는 리듬을 영화적 언어로 쌓아 올렸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주로 어둡다. 흑백의 대조 아래 종종 붉은 색이 주요하게 쓰인다. 자크 오디아르의 전작 <파리 13구>(2021)를 작업했던 폴 기욤 촬영감독은 어둠과 빛을 오가며 내밀한 성찰의 순간, 감정의 고조, 끓어 오르는 내면의 욕망을 시각적 아리아처럼 펼쳐 나간다. 여타 뮤지컬 영화처럼 감정적으로 귀를 파고드는 넘버나, 오페라의 대표 유명 아리아처럼 듣는 사람을 뒤 흔드는 노래는 부재한다. 극 절정의 순간 영화적 장면이 이런 아리아의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사운드 트랙은 서사를 뒷받침하는 부가적 역할의 배경 요소가 아니라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힘 그 자체가 되어 영화 구조 속에 소금처럼 매끄럽게 녹아 들어가 있다. 걸작 오페라들이 그러하듯, 이 영화는 크레센도 만큼이나 강렬한 침묵을 포용해 모든 박자와 리듬과 시퀀스 사이에서 인물의 망설임, 내면의 미세한 떨림, 계시와도 같은 직감을 빠트림 없이 느끼게 해준다.  

 

〈에밀리아 페레즈〉
〈에밀리아 페레즈〉


<에밀리아 페레즈>는 한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 대한 심오한 성찰의 과정을 선사한다. 얼핏 돈으로 새 삶을 살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자본주의의 거대한 논리가 작용하는 세상, 마약 카르텔과 권력형 비리가 얼룩진 멕시코를 배경으로 했음에도, 진정한 성취, 사랑, 행복, 내면의 평화는 여전히 찾기 어렵다. 리타의 지성을 2백만 달러에 사들여 마치 자신의 오른팔처럼 사용하지만 성별이 바뀐 이후에도 하나의 욕망이 채워지면 또 다른 욕망이 슬며시 고개를 디민다. 오디아르는 현실에 있을 법한 그럴싸한 이야기에 음악과 춤, 배경으로 판타지적 요소를 섞어 또다른 질문을 던진다. 거의 한계를 모르는 듯한 재력도 인생의 모든 면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진짜 나’로 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죽었다 다시 태어나고 나서도 인생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어둠의 세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세운 ‘빛’(자선 단체의 이름)을 통해 만나게 되는 인연들은 여전히 부패하고 타락한 기득권자들이다. 마니타스에서 에밀리아로, 완전히 육체를 바꾸었으나 순수한 어린아이의 후각으로는 여전히 ‘아빠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처럼, 영혼 속 작동하는 감정들은 바꿀 수 없다. 자식에 대한 간절한 부정, 질투심, 새로운 사랑에 대한 욕망이 여전히 변화한 신체적 외피 아래 용암처럼 끓어 오른다.

 

〈에밀리아 페레즈〉
〈에밀리아 페레즈〉

 

 

여성의 삶을 살며, 여성의 육체를 통해서만 구현 가능한, 지금까지의 어둠의 삶과는 반대된 자선 사업가로서 에밀리아의 삶은 오직

‘죽음’으로만 완성된다.

바그너나 베르디, 푸치니의 오페라가 그러했듯이.

 

서사를 전개하는 도구로서 춤과 음악은 한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이해하게 돕는 공감의 수단이 되어 관객을 이 혼란스러운 여정에 단숨에 끌어들인다. 진정한 ‘나’로 살고자 한 에밀리아의 결심은 인간 존재의 불완전함을 강조하는 엄청난 용기에 기반한 행동이고, 용기는 그에 따른 댓가를 치르게 한다. 마약 카르텔의 리더로서 ‘짐승처럼’ 쌓아온 과거의 자신과 그 삶을 다 버리겠다는 다짐을 스스로 배신하며, 에밀리아는 리타를 통해 가족들을 다시 멕시코로 데려오고야 만다. 아무리 많은 부를 쌓고 사회적 명예를 얻어도, 속죄와 구원은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니다. 끝없이 분투해야 얻어지는 내면의 평화는 한 개인의 재력과 무관하게 평등한 무엇이다. 여성의 삶을 살며, 여성의 육체를 통해서만 구현 가능한, 지금까지의 어둠의 삶과는 반대된 자선 사업가로서 에밀리아의 삶은 오직 ‘죽음으로만 완성’된다. 바그너나 베르디, 푸치니의 오페라가 그러했듯이.
 

〈에밀리아 페레즈〉
〈에밀리아 페레즈〉


폭력과 어둠으로 가득 찬 마약 카르텔의 잔혹한 리더 -마니타스-의 삶이 거짓 죽음으로 마무리 되었고, 모든 것을 걸고 진정한 여성이 되기 위해 노력한 후에야 비로소 빛을 추구할 수 있게 된 에밀리아의 삶도 죽음으로 완성된다. 마지막 장면인 장례식에서 그녀는 거의 성인에 가까운 지위로 승격되면서, 그녀의 형상 아래를 사람들이 따라가며 영화는 끝난다. 무시무시한 암흑의 권력에서 존경받는 성녀로의 변화는 이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통렬한 주제이자 모순 가득한 인간의 삶을 가슴 아프게 대변한다. 한 사람의 삶에서 부패와 타락, 기만과 위선이 진정성과 구원, 희생으로 변주되며 여전히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는 모습은 음악과 춤이 아니었더라면 이토록 함축적이면서 호소력 있게 전달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에밀리아 페레즈〉
〈에밀리아 페레즈〉


영화에 대해 호불호가 갈리는 것은 필연에 가깝다. 전통적인 뮤지컬 영화의 문법에 익숙한 이들에게 <에밀리아 페레즈>는 그 기대를 산산이 부숴버린다. 영화는 끝없이 질문을 던지고, 우리를 불편하게 하며 오늘날 우리를 둘러싼 삶을 응시하게 한다. 춤과 노래로 엮어낸 서사 속 지난 세기 무대예술 혁신가들의 영향도 엿보인다. 밥 윌슨, 피터 브룩, 톰 웨이츠, 닉 케이브… 
 

<에밀리아 페레즈>에 대해 호불호가 갈리는 것은 필연에 가깝다.

전통적인 뮤지컬 영화의 문법에 익숙한 이들의 기대를 산산이

부숴버린다.

〈에밀리아 페레즈〉
〈에밀리아 페레즈〉


20세기 들어 영화가 발명되기 전까지 오페라는 엔터테인먼트의 정점에 있는 예술이었다. 오페라 스타는 오늘날 할리우드 스타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명성을 누렸고, 작곡가들 역시 오페라의 성공으로 평생이 보장되기에 앞 다투어 오페라에 뛰어들었다. 대본을 쓸 때부터 오페라를 염두에 두었던 오디아르는 결국 ‘제 7의 예술인 영화’를 선택해, 보다 품이 넉넉한 장르로 오페라를 끌어 안았다. (오페라는 제 6의 예술에 속한다)기존의 형식과 스타일을 차용하면서도, 뻔한 전형성을 절묘하게 피해가며 여전히 새로울 수 있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에밀리아 페레즈〉
〈에밀리아 페레즈〉


<에밀리아 페레즈>를 ‘여자가 되고 싶었던 멕시코 카르텔 리더의 이야기를 뮤지컬로 풀어낸 영화’로 한 줄 요약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 영화는 커다란 용광로처럼 아주 많은 요소들이 녹아 들어가, 본 적 없는 형태의 무엇이 되어 나온 결과물이며, 오디아르는 좀처럼 섞이기 어려운 이 강렬한 재료들을 놀라운 집중력과 끈기로 불균질하게 녹여내 영화라는 틀 안에서 형상을 주조 해낸 연금술사와도 같다. 조 샐다나는 주연을 능가하는 존재감으로 극 전반을 이끌고, 셀레나 고메즈, 아드리아나 파즈 역시 동선까지 다 정해진 무대 위 공연처럼 정교하게 조율된 앙상블로 극 전체의 서사에 리듬감과 의미를 부여한다. <에밀리아 페레즈>는 결국 오페라를 품을 수 있는 영화의 가능성을 증명해 보이며 다시 한번 영화에 대해 경외심을 품게 한다. 노래와 춤, 인물의 서사가 결합해 펼쳐지는 이토록 강렬하고 찬란한 영화적 경험이 또 언제 였던가.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간 영화가 끝나는 순간, 묵직한 한 방 같은 오디아르의 연금술에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 아쉽게도 이번 내한이 취소된 자크 오디아르 감독과의 단독 화상 인터뷰가 3월 19일(수) 씨네플레이 유튜브를 통해 공개됩니다. <에밀리아 페레즈>를 둘러싼 여러 논란에 대해서도 성실하고 진솔하게 입장을 밝힐 예정입니다.
 

자크 오디아르 감독
자크 오디아르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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