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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한 '미국' 영화

씨네플레이

 

11월 6일 개봉한 <아노라>는 올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전 세계 감독들의 신작이 격전을 치르는 영화제인 만큼 미국 영화가 최고상을 받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아노라>와 더불어 근 40년 사이 황금종려상의 주인공이 된 미국영화들을 소개한다.


1989년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Sex, Lies, and Videotape

스티븐 소더버그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1989년 황금종려상 수상작은 35년이 지난 지금 봐도 이변 그 자체였다. 당시 스티븐 소더버그의 나이가 불과 26세였다는 것뿐만 아니라, 칸 영화제는 ‘세계 첫 공개’를 고집하고 특정 감독을 처음부터 경쟁부문 후보로 초청하는 경우도 희박한 마당에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는 데뷔작이었고 이미 그해 초 선댄스 영화제에서 처음 선보여 관객상까지 수상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존(피터 갤러거)은 아내 앤(앤디 맥도웰)의 동생 신시아(로라 샌 지아코모)와 외도 중이고, 앤은 존의 친구 그레이엄(제임스 스페이더)이 자신이 성불구자이고 여자들의 성경험을 인터뷰하고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를 보면서 욕구를 채운다는 고백을 듣고 그에게 이끌린다. 1989년 경쟁부문 후보작 중에서는 미국의 흑인 감독 스파이크 리의 <똑바로 살아라>가 압도적인 찬사를 받았으나 결국 무관에 그치자 현장에서 리는 강력하게 반감을 드러냈다.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는 황금종려상과 더불어 남우주연상(제임스 스페이더)과 FIPRESCI(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까지 받았다.


1990년

광란의 사랑

Wild at Heart

데이비드 린치

〈광란의 사랑〉
〈광란의 사랑〉

데이비드 린치는 초창기엔 영화제와 거리가 멀었지만, 다섯 번째 장편 <광란의 사랑>으로 처음 칸 경쟁부문에 지목돼 바로 황금종려상을 차지했다. 영화제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 탓에 <광란의 사랑> 수상에 대한 반대 의견이 거세게 일기도 했다. 린치의 전작 <블루 벨벳>(1986)에서 활약한 로라 던과 <아리조나 유괴사건>(1987)과 <문스트럭>(1987)으로 연기력을 두루 인정받은 니콜라스 케이지를 내세운 <광란의 사랑>은 (한국 개봉 제목대로) 정신 나간 사랑을 쏟아낸다. 세일러(니콜라스 케이지)와 룰라(로라 던)가 세일러를 원하는 룰라 엄마 마리에타(다이앤 래드)를 피해 도피하는 그 여정엔 수위 높은 폭력과 섹스가 펼쳐지고, 두 주인공의 사랑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단단해진다. <트윈 픽스: 파이어 워크 위드 미>(1992)와 <스트레이트 스토리>(1999)로 칸 경쟁부문 후보에 오른 린치는 2001년 <멀홀랜드 드라이브>로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의 코엔 형제와 함께) 감독상을 받았다.


1991년

바톤 핑크

Barton Fink

코엔 형제

〈바톤 핑크〉
〈바톤 핑크〉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와 <광란의 사랑>에 이어 1991년의 황금종려상 역시 미국영화의 몫이었다. 린치와 마찬가지로 코엔 형제 역시 네 번째 영화 <바톤 핑크>로 처음 칸 경쟁부문에 초청돼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심사위원장 로만 폴란스키를 비롯한 심사위원 전원 만장일치의 결정이었고,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존 터투로)까지 3관왕을 달성하는 유례없는 기록을 세웠다. <밀러스 크로싱>(1990) 시나리오 집필에 고통을 겪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바톤 핑크>는 극작가로 이름을 알린 바톤 핑크(존 터투로)가 할리우드 대형 영화사로부터 레슬링 시나리오를 청탁 받지만 좀처럼 진행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와중에 벌어지는 기괴한 이야기를 그린다. 이후 코엔 형제는 7번 더 칸 경쟁 후보에 올라 심사위원특별상(<인사이드 르윈>), 감독상(<파고>와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을 수상했다.


1994년

펄프 픽션

Pulp Fiction

쿠엔틴 타란티노

〈펄프 픽션〉
〈펄프 픽션〉

1994년 칸 영화제 최대 이슈는 <세 가지 색: 블루> <세 가지 색: 화이트>로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과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한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가 <세 가지 색: 레드>로 칸 황금종려상까지 거머쥐느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결과는 실패.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이끌었던 심사위원진은 영화제 막바지에 공개된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을 지목했고, <세 가지 색: 레드>는 무관에 그치고 말았다.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1992)로 파란을 일으킨 타란티노가 2년 만에 발표한 두 번째 영화 <펄프 픽션>은 일곱 파트로 나누어진 ‘싸구려 소설’ 같은 이야기들 안에 선명한 캐릭터들이 마주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과 그 사이에 나누는 길지만 타이트한 대화를 능수능란하게 펼쳐 보인다. 당시엔 <펄프 픽션>이 황금종려상을 받았다는 데에 이견이 꽤나 많았지만, 30년이 지난 현재 <펄프 픽션>은 1990년대 최고의 영화 중 하나에, 타란티노는 당대 가장 위대한 감독 반열에 올랐다.

 


2003년

엘리펀트

Elephant

구스 반 산트

〈엘리펀트〉
〈엘리펀트〉

구스 반 산트만큼 이상한 필모그래피를 가진 사람이 또 있을까. <굿 윌 헌팅>(1997)의 대성공 이후 알프레드 히치콕의 걸작 <싸이코>(1960)를 거의 숏 바이 숏으로 리메이크 한 <싸이코>(1998)를 만들어 완전한 실패를 맛보고, 2000년대 들어서는 <게리>(2002)를 시작으로 형식적인 모험이 돋보이는 ‘죽음 3부작’을 내놓으면서 예상치 못한 변화를 보여줬다. <엘리펀트>는 ‘죽음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이다. 1999년 벌어진 콜럼바인 고교 총기난사 사건을 각기 다른 인물들의 시점으로 나누어 극화했다. 촬영감독 해리스 사비데즈의 유려한 촬영으로 잡아낸 이미지는 더없이 아름답고, 그만큼 잔혹하다. 영국 감독 앨런 클라크의 단편영화 <엘리펀트>(1989)에서 제목뿐만 아니라 미니멀리즘 스타일과 트래킹 촬영 등 많은 걸 차용했다. <엘리펀트>로 처음 칸 경쟁부문에 초청된 반 산트는 곧장 황금종려상과 감독상을 수상했고, 다음 작품 <라스트 데이즈>(2005)와 <파라노이드 파크>(2007)도 연달아 경쟁 후보에 올랐다.


2004년

화씨 9/11

Fahrenheit 9/11

마이클 무어

〈화씨 9/11〉
〈화씨 9/11〉

심사위원장 쿠엔틴 타란티노의 열렬한 지지에 힘입어 박찬욱의 <올드보이>(2003)가 그랑프리를 거머쥔 2004년 칸 영화제의 황금종려상은 <화씨 9/11>이 가져갔다. <엘리펀트>가 다룬 콜럼바인 고교 총기난사 사건으로 다큐멘터리 <볼링 포 콜럼바인>(2002)을 만든 마이클 무어의 신작으로, 2004년 당시 연임을 노리던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비리를 낱낱이 파헤치는 다큐멘터리다. 미국 대선을 몇 달 앞둔 시기에 나온 영화라 <화씨 9/11>의 황금종려상 선정은 다분히 정치적인 판단이었다는 의견이 주를 이룬다. <화씨 9/11>은 제작비 대비 40배에 육박하는 흥행 성적을 거뒀으나, 20세기 마지막 미국 대통령이었던 조지 W. 부시는 결국 21세기 첫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2011년

트리 오브 라이프

The Tree of Life

테렌스 맬릭

〈트리 오브 라이프〉
〈트리 오브 라이프〉

1978년 두 번째 영화 <천국의 나날들>로 처음 칸 경쟁부문에 초청돼 감독상을 수상한 테렌스 맬릭은 네 번째 영화 <트리 오브 라이프>로 무려 33년 만에 칸 경쟁 후보에 올라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2010년을 사는 중년 남자 잭(숀 펜)이 1950년대 텍사스에서 가부장적인 아버지(브래드 피트), 인자한 어머니(제시카 차스테인)와 보낸 유년시절을 회상하는 작품이다. 유장하고 철학적인 분위기와 촬영감독 엠마누엘 루베즈키가 포착한 독특한 화면 구도, 그리고 태초의 지구를 아주 길게 표현한 그래픽 시퀀스는 우직한 야심이냐 과하디과한 허장성세나냐는 찬반이 일었다. <트리 오브 라이프> 이전까지 과작의 감독으로 잘 알려져 있던 맬릭은 이후 8년 사이만 5개의 장편을 발표하는 변화를 보여줬다. 예수의 생애를 그린 최신작 <웨이 오브 더 윈드>는 2019년에 촬영을 마쳤지만 아직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


2024년​

아노라

Anora

션 베이커

〈아노라〉
〈아노라〉

션 베이커가 칸 영화제와 처음 연을 맺은 건 2017년작 <플로리다 프로젝트>부터다.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감독주간' 부문에 초청됐고, <레드 로켓>(2021)이 처음 경쟁부문 후보가 된 데 이어 올해 최신작 <아노라>는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었다. (공교롭게도 세 작품 모두 베이커의 아내 서맨사 콴이 프로듀서를 맡았다.) 베이커의 여느 영화들처럼 <아노라>의 주인공 애니(미키 매디슨) 역시 성노동자다. 러시아계 이주민이 많은 브라이튼 비치에 사는 스트리퍼 애니는 손님으로 온 러시아인 바냐(마크 에이델슈테인)와 만나 급속도로 결혼까지 하게 되지만, 곧 러시아 거대 부호인 바냐의 부모는 결혼을 무효로 만들기 위해 사람을 쓴다. 흥청망청 '플렉스'로 가득한 신데렐라 이야기처럼 보이던 영화는 갑자기 정신을 쏙 빼놓는 소동극과 추적극으로 탈바꿈하면서 또 다른 결을 드러낸다. 그레타 거윅이 이끈 심사위원진을 사로잡은 것도 바로 그 도약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