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페이지를 넘기는 건, 참 아쉬우면서도 설레는 일이다. 그 설렘은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추억과 감상을 곱씹을 수 있기에 생겨나는 것 같다. 씨네플레이 기자들도 이번 2024년을 정산하는 '올해의 영화' 5편을 선정하면서 그런 마음을 느꼈다. 한국영화계는 쉽지 않았고, 극장가는 매 분기 위기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은 여전히 극장에서 새로운 영화를 만나길 기다리고 또 기꺼이 극장으로 향했다. 씨네플레이 기자들 또한 한 명의 관객으로서 작품을 만났으며, 그중 몇몇 작품에선 강렬한 감상을 느꼈다. 해외영화, 한국영화 각각 5편씩 올해의 영화를 선정한 리스트를 아래 소개한다. 해외영화, 한국영화 순이며 개별 리스트는 별도의 순위 없이 가나다 순으로 나열했다. 2024년에 영화제 및 특별 상영 등을 제외하고 극장에 정식개봉한 영화를 대상으로 한다.
해외영화 다득표 순위
1위 (3표)
<퍼펙트 데이즈>
공동 2위 (2표)
<바튼 아카데미>
<서브스턴스>
<스턴트맨>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챌린저스>

올해 씨네플레이 기자들의 1픽은 세 명의 선택을 받은 빔 벤더스 감독의 <퍼펙트 데이즈>이다. 도쿄의 공공시설 청소부 히라야마(야쿠쇼 코지)의 일상을 따라가는 영화는 이 반복되는 일상에서의 히라야마의 얼굴을 포착해 일상의 의미를 관객 저마다에게 일깨운다. 빔 벤더스가 구성한 사운드트랙이 흐르는 가운데, 야쿠쇼 코지의 연기가 평범한 듯 비범하게 스크린 곳곳을 채운다. ‘코모레비’, “콘도와 콘도, 이마와 이마”(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란 일본어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공동 2위는 2표를 받은 <바튼 아카데미>(알렉산더 페인), <서브스턴스>(코랄리 파르쟈), <스턴트맨>(데이빗 레이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하마구치 류스케), <존 오브 인터레스트>(조나단 글래이저), <챌린저스>(루카 구아다니노) 여섯 작품이다. <바튼 아카데미>는 크리스마스에 학교에 남겨진 세 사람의 이야기로 타인을 재단하지 않고 그 거리감을 존중하며 가까워지는 관계의 미학을 담는다. <서브스턴스>는 바디호러 스타일과 인간 상품화의 비판적 메시지로 왕년의 스타가 젊어지는 약을 투여했다가 겪는 일을 묘사한다. 과거 동명 TV드라마의 리메이크인 <스턴트맨>은 납치된 스타를 찾아나선 스턴트맨의 고군분투로 디지털에 집착하는 현대 영화에서 아날로그적 장인 정신을 되살린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문법으로 현실적인 풍경 뒤로 형이상적 메시지를 던졌고,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나치 수용소 관리소장 가족의 평범한 일상으로 악을 새롭게 구성한다. <챌린저스>는 두 남자와 그 두 사람 사이 한 여성 간의 기묘한 애정관계를 테니스 경기의 랠리를 통해 풀어낸다.
해외영화 부문 개인 선정작
주성철 편집장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류는 하류에 책임져야 한다는, <기생충>에 대한 하마구치 류스케식의 해석
<존 오브 인터레스트> 홀로코스트라는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담담한 일상을 단 한 컷으로 포개는 초월적 시선
<챌린저스> 도파민 분비의 영상화, 루카 구아다니노는 오감을 초월하여 영화를 만든다
<추락의 해부> 보고 듣고 말하는 것 중 과연 무엇이 진실인가, 인간의 편견에 대한 놀라운 통찰
<퍼펙트 데이즈> 오즈 야스지로의 고향에 가서 그에 빙의한 것처럼 영화를 만든 빔 벤더스는 얼마나 행복할까

성찬얼
<듄: 파트 2> 스타일로 입덕의 문을 연 파트 1, 서사로 덕질 출구 걸어잠그는 파트 2
<바튼 아카데미> 때로는 포옹보다 손을 맞잡고 그의 오른눈을 보는 것이 진심에 가깝다
<챌린저스> 사랑의 우정의 기묘한 랠리
<키메라> 죽음과 지나간 시간 근처에서 서성여야만 이어갈 수 있는, 그런 삶(들)의 초상
<퍼펙트 데이즈> 같은 공간에 있다고, 실제로 같은 세계를 사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세계는 각자의 해석에서 비롯된다.

김지연
<노 베어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이란에서도
<로봇 드림> 사람보다 성숙한 로봇과 강아지가 들려주는, 관계와 이별에 관한 고찰
<메이 디셈버> 소름끼치는 장면 없이 소름끼치는 심리 스릴러
<서브스턴스> ‘체험’하기 좋은 영화, 진짜 기괴한 건 몬스트로엘리자수가 아니라는 듯
<스턴트맨> “디스 이즈 시네마”

추아영
<바튼 아카데미> 할 애쉬비의 정취와 폴 지아마티의 내면 연기가 자아내는 애잔한 휴머니즘
<아노라> 올해 가장 아름다운 엔딩, <플로리다 프로젝트> 이후 더 성숙해진 션 베이커 월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체호프의 자연관을 뛰어넘고 나아간 하마구치 류스케의 차디찬 생태계
<존 오브 인터레스트> 픽션으로 침투한 현실, 우리에게 이 영화를 픽션으로 소비할 권리가 있는가
<트위스터스> 재난이 범람하는 위기의 시대에 영화의 존재 의미를 증명하다

이진주
<서브스턴스> (어금니를 앙 다물며) 미쳐야 미친다
<스턴트맨> 느슨해진 블록버스터계에 긴장감을 더한 육각형 영화
<와일드 로봇> ‘나’ 자신도 뛰어넘는 사랑에 대한 가장 완벽한 동화
<인사이드 아웃2> 어쩔 수 없었던 시간을 긍휼히 바라보다
<퍼펙트 데이즈> 어제와 같은 오늘도 마치 처음인 것처럼.

한국영화 다득표 순위
공동 1위 (3표)
<장손>
<파묘>
<핸섬가이즈>
공동 2위 (2표)
<대도시의 사랑법>
<리볼버>
<아메바 소녀들과 학교괴담: 개교기념일>



올해는 한국영화에서 유독 박빙이 많았다. 이를 부정적으로 해석한다면 전반적으로 평범한 영화들 사이에서 톡 튀어나온 영화들이 독식했다는 것이고, 긍정적으로 해석한다면 그 특출난 영화들이 각자 독특한 지점을 겨냥해 독자적인 영역을 획득했다는 의미다. 먼저 3표를 받아 공동 1위에 오른 <장손> <파묘> <핸섬가이즈>는 거칠게 묶자면 '죽음'을 경유한다. 다만 그 죽음이 겨냥한 지점도, 화살이 날아가는 방식도 모두 달랐다. <장손>은 두부 명가 삼대를 소재로 변화하는 세상에서 점차 해체되는 전통적인 가족상과 그들을 관통하는 정서를 그린다. <파묘>는 일가족의 저주 받은 죽음을 오컬트적 요소로 활용해 한국의 근현대사를 조명한다. <핸섬가이즈>는 의도치 않은 죽음의 연쇄로 웃음과 공포를 유발해 외형에 집착하는 세상을 함께 비웃는다. 세 작품은 각 장르에서 훌륭한 완성도를 보여주는데, 공통적으로 배우들의 앙상블이 특히 빛났다. 2위 역시 세 작품이 2표를 받아 공동으로 이름을 올렸다. 동명 소설 원작의 <대도시의 사랑법>은 ‘맞춰가며 사는 것’이 중요한 한국사회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는 여성과 퀴어 남성을 주인공으로 진짜 나로 사는 법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준다. <리볼버>는 전직 형사이자 막 출소한 여성의 이야기를 빛과 이미지로 그 고독한 무드를 담아낸다. <아메바 소녀들과 학교괴담: 개교기념일>은 다소 침체돼있는 한국사회가 잊고 있던 재기발랄한 상상력으로 B급의 맛을 되살려냈다.
한국영화 부문 개인 선정작
이진주
<미망> 우리는 모두 어느 ‘미망’에 있다
<세기말의 사랑> 사람은 사람을 구할 수 없어도, 사랑은 사람을 구하지
<여행자의 필요>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 윤동주 ‘새로운 길’ 중
<아메바 소녀들과 학교 괴담: 개교기념일> 나도 껴줘
<장손> 태어나보니 돼지꼬리가(*「백년의 고독」)

추아영
<대도시의 사랑법> 블루베리와 말보로 레드의 조합처럼 달콤하고 씁쓸한 우리의 청춘
<리볼버>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떠올리게 하는 스타일과 미장센, 잊혔던 아름다움이여!
<보통의 가족> 세대를 둘러싼 살벌한 막장 드라마로 현재 한국 사회의 도덕성을 집요하게 탐구하다
<파묘> 오컬트로 시작해서 퇴마물로 끝나는 그야말로 오컬트 장르의 별난바
<핸섬가이즈> 한국 컬트영화의 미래가 밝다! <미지왕>을 넘어설 때까지 영차영차

김지연
<대도시의 사랑법> 한국 상업영화에서 이런 그림을 본 적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댓글부대> 원작을 뛰어넘는, 힙하고 세련된 풍자를 곁들인 블랙코미디
<빅토리> 평가절하된 ‘무해한 웃음’의 가치
<정순> <다음 소희>를 잇는, 개인적이지만 구조적인 이야기
<파묘> 컨버스 신고 마셜 스피커 틀고 굿하는 비주얼 하나만으로 설명 완료

성찬얼
<되살아나는 목소리> 집단보다 더 큰 개인이 존재할 수 있는가 묻는다면, 보여줄 수 있는 대답
<딸에 대하여> 이성적 판단과 두려움이 아니라 인정과 선의가 번지길 원하는 한 폭의 회화
<아메바 소녀들과 학교괴담: 개교기념일> “나 윌리밍키인데 개추 눌렀다”
<장손> 사랑하면서 미워하고, 멀어지고 싶어도 언제나 흔적이 남는 그 관계, 가족
<핸섬가이즈> 단지 플레이팅이 괴상할 뿐인 찐맛집

주성철 편집장
<리볼버> 영화라는 미지의 예술로부터 ‘향’을 끌어내는 오승욱과 전도연만의 경이로운 방식
<베테랑2> ‘빌런의 교체와 강화’라는 욕심을 버리고 뚝심 있게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장손>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서 프레임을 지켜내는 신인 감독의 놀라운 지구력
<파묘> ‘경로를 이탈하여 재검색합니다’ 라는 네비네이션 멘트는 올해 최고의 대사로 충분하다
<핸섬가이즈> 원작에 구애받지 않고 초고속 축지법을 쓰는 유쾌한 상상력의 발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