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드풀> 시리즈는 참 미묘한 구석이 있다. 생각해 보면 데드풀의 시작은 영화 외적으로도 참 영화스러웠는데, 누가 알았겠는가. <엑스맨> 시리즈에서도, DC 실사화 시리즈에서도 고배를 맛봐야 했던 라이언 레이놀즈가 2024년에는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어떻게든 끌고 갈 유일한 주자인 <데드풀 3>의 주연배우이자 제작자가 될 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다시피 라이언 레이놀즈에게 <그린 랜턴: 반지의 선택>의 쓴맛은 꽤 컸던 모양이다. 솔직히 흥행 기록만으로도 실패한 영화이지만.... 당시 DC 캐릭터 기반의 실사영화 치고는 그리 성과가 좋지 못했고, 심지어는 지금까지도 인터넷 등지에서 밈으로 쓰일 정도다. 물론 계속해서 거론된다는 건 배우 개인의 입장은 차치하고서라도 인지도 면에서는 아직 짱짱하단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라이언 레이놀즈의 세 번째 데드풀은 지금 MCU의 유일한 주자가 됐다. MCU는 4페이즈에 접어들면서 계속된 고배를 맛봐야 했는데,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플랫폼을 설립하고 채널을 확장한 만큼 수많은 콘텐츠가 쏟아져 나왔지만 기존 MCU 팬들은 물론 대중들마저도 디즈니 플러스 '오리지널 드라마를 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들에 부정적이었으며 모든 걸 다 떠나서 재미도 예전만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관객이 원하는 건 장르와 서사에 걸맞은 재미였는데, 그걸 주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결과 마블 스튜디오는 할리우드 파업을 기점으로 전체적인 기획 수정을 단행했다.
2024년이 밝았고, 지난해 MCU가 야심 차게 선보였던 영화들이 줄줄이 패착을 면치 못했던 탓인지 마블 스튜디오는 올해 개봉을 예정하고 있던 모든 작품의 개봉을 연기하고 단 한 작품만 남겼다. 그게 바로 <데드풀 3>이다.

데드풀은 코믹스에서도 꽤나 독특한 캐릭터다. 영화가 코믹스 원전 서사를 충실히 따라가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그 복잡미묘하고 수다스러우며 잔인하지만 잔혹하진 않은, 그러면서도 제4의 벽을 자기 집 대문처럼 드나드는 데드풀의 매력만큼은 충실하게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끊임없이 떠드는 이 캐릭터의 향방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고 그러면서도 연인 바네사에게 바치는 순애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발현되는 인간미는 데드풀이라는 복잡미묘한 캐릭터에 빠지게 하기에는 충분한 매력포인트였다.
시리즈의 시놉시스를 쭉 살펴보면 이 생소할 수 있는(물론 코믹스 팬들에겐 아니지만) 캐릭터를 대중에 소개하는 단계를 착실히 밟아왔다는 걸 알 수 있는데, 1편이 용병 웨이드 윌슨은 왜 '데드풀'이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기원 서사라면 2편은 '데드풀'이 히어로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자신과 관계없는 누군가를 위해 일생일대의 선택을 하는 방식을 보여주었다. 즉 기원 서사로 시작해 히어로로서의 당위를 설명하는 데 두 편을 쓴 셈이다. 이렇게 말하면 히어로무비치곤 교과서적인 고리타분함으로 들리는 구석이 있지만, 데드풀에게 그런 고리타분함은 없다. 다만 헬로키티 배낭이 있을 뿐...

기발한 방식의 서사, 예고편조차 관객의 뒤통수를 유쾌하게 날리는 마케팅, 보기만 해도 합성 밈 같은 공식 포스터들은 데드풀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매력'을 잘 보여주었고 여기에는 시리즈의 제작자이자 주연배우 라이언 레이놀즈의 공도 상당하다. 데드풀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애정을 아끼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20세기폭스 사가 디즈니에 인수되었을 때도 시리즈의 기조를 지키려고 노력했으며, 최근 3편의 촬영장 유출컷이 화제거리가 되자 처음에는 '유출컷을 소비하지 말아 달라'고 쓰더니만 다음날에는 '나도 유출에 동참하겠다'면서 아무래도 합성인 것 같은 유출컷들을 자기 공식 계정에 올리기도 했다. 정말 데드풀 같은 배우다.


<데드풀 3>이 화젯거리가 되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제작 단계부터 20세기폭스 <엑스맨> 유니버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울버린이 등장한다는 소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맨중맨' 휴 잭맨과 라이언 레이놀즈는 사적으로도 가까운 사이인데 이 두 사람이 영화에서 '울버린'과 '데드풀'로 만난다는 게 꽤나 재밌는 일이다. 여러 가지 문제로 <엑스맨> 유니버스 안에 있었음에도 이야기의 주류에 서 있는 엑스맨들과 데드풀이 연계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로건은 이미 사망한 상태라 등장 가능성이 낮았기 때문에 더 반가운 일이었다.
울버린 재출연이 루머였던 당시엔 갑론을박이 많았지만, 배우 두 사람의 친분과 더불어 출연에 대한 긍정적인 언급으로 인해 기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2022년 9월에 두 사람은 함께 예고편 영상에 등장해 울버린의 <데드풀 3> 합류를 확정했다. 음소거된 상태로 열심히 떠드는 두 사람(...) 덕분에 팬들은 입모양을 읽어내기도.

라이언 레이놀즈 본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폭스 사는 <데드풀 3>의 제작을 일찍이 확정했고, 울버린의 출연도 이때쯤 확정되어 있었던 것 같아 보인다. 데드풀과 울버린이 함께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는 로드트립 무비가 기조였다고 하는데, 제작사가 마블 스튜디오로 변경되면서 얼마나 바뀌었을지는 모르겠으나 유출된 정보에 따르면 전혀 다른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엑스맨 유니버스에서는 말이 많다는 이유로 입을 봉인당한 뮤턴트(...)로 출연한 비극적 과거를 갖고 있는 라이언 레이놀즈로서는 격세지감일 수도 있겠다. 자신의 이름을 딴 영화에 엑스맨 유니버스의 주축이었던 울버린이 등장하게 됐으니, 슬픈 일이 두 번(하나는 그린 랜턴) 지나가니 좋은 일이 두 번 왔다 쳐야겠다.

다시 MCU로 돌아오면.... 개봉 연기를 차치하고서라도 현재 MCU의 메인 서사를 끌어가고 있는 것은 멀티버스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다. 이전에 공개한 대로 <어벤져스: 캉 다이너스티>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는데, 덕분에 인피니티 사가 이후로 공개된 대부분의 작품에 멀티버스에 대한 소개가 있고 이 개념에 대해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물론 그 설명이 늘 흥미롭지는 않았고(사실 <로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퀀텀 렐름에 진입해 캉을 소개한 영화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조차 씁쓸한 고배를 마셔야 했다.
<데드풀 3>도 예외는 아니다. 데드풀은 로건과 함께 지난날의 유니버스를 순회하며 멀티버스의 개념을 본격적인 서사로 끌어올 것 같아 보이는데, 어쩌면 멀티버스 자체에 염증을 느껴 다 때려부수고 싶어 할지도 모르겠다(이 캐릭터는 도통 예측이 불가능해서...). 원작 코믹스에서는 실제로 데드풀이 멀티버스를 파괴하고 다닌 적도 있었으므로 안심(?) 할 수는 없는데 애매한 멀티버스들을 깔끔하게 처리한다는 측면에서는 딱히 나쁘지 않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멀티버스를 정립하고 다시 세팅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 줄 만한, 그리고 멀티버스 사가에 다시금 관객들이 흥미를 느끼게 할 만한 캐릭터로 데드풀이 낙점된 것은 생각해 보면 꽤나 당연한 일이다. R등급이라는 점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어차피 기존 <데드풀> 영화들도 R등급이었고, 멀티버스 사가에서 정말 오랜만에 등장하는 사전 지식이 별로 필요하지 않은 영화가 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엑스맨> 시리즈에 대해 안다면 더 웃을 거리는 있겠지만, 데드풀은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고 워낙 말이 많기 때문에(....) 이번에도 자기 얘기를 지나칠 만큼 장황하게, 하지만 지루하지 않게 늘어놔 줄 거라고 믿는다. 마블 스튜디오에서 2024년의 주자로 <데드풀 3>만 남긴 이유가 과연 '충분히 재미있기 때문'일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시리즈는 늘 유쾌했고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오랜만에, 한번 믿어보고 싶다.